Page 129 - Thursday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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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케리 (William Carey)

3 년전 인도 콜카타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계응 선교사 부부를 방문했다. 김

선교사는 대학 때 친구인데, 사업을 하다가 정리하고, 2007 년 부터 인도 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인도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김 선교사 부부의 람바강 지역(벵골) 사역도

보고 싶었다. 장로로서 교회를 섬기던 경험과 사업가로서의 경륜으로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었다.

인도 체류중 하루는 William Carey(1761-1834 영국 출생) 의 사역지를 둘러 보았다.

윌리암 케리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서 성서번역, 현지인 사역자 양성, 그리고 사회

개혁면에서 큰 업적을 이루었다.

케리의 직업은 구두 수선공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물학에 관심이 있었고, 언어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라틴어를 가르쳤을 뿐아니라,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화란어,

불란서어 등도 혼자 습득을 했다.

침례교인으로 세례를 받고 후에는 목회자가 되었다. 그후 학교 교장으로 피택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The Baptist Missionary Society 를 조직하고 해외 선교에

힘썼다.

1793 년에 케리는 선교사의 신분으로 인도로 출발했다. Serampore 지역에 정착을

했는데, 그당시 덴마크 지배하에 있던 곳으로 콜카타에서 자동차로 1 시간 30 분 거리이다.

케리(33 살)는 인도에 도착한 후 벵갈어를 배워 7 년째 되는 해에 성경번역을 완성했다.

케리는 현지인들이 성서를 그들의 언어로 읽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뚜렷했다. 그후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한 45 개 언어로 성서를 출판했다.

                                그가 성서를 여러 종류의 언어로

                    출판할 수 있었던 것은 William Word

                    선교사의 도움이 컸다.    그는

                    인쇄소를 설치하여 번역물이 나올

                    때마다, 바로 인쇄하여 출판

                    보급하였다. 또한 John Fountain

                    선교사는 행정에 재능이 있어 여러

                    지역에 많은 학교를 세웠다. 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역사회

                    지도자를 양성했다. 그는 학교 운영뿐

                    아니라 기금모임에 특출한 능력이

                    있어, 선교 단체가 자급자족하도록

도왔다. 이들 세 선교사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재능에 따라 함께 사역하며, 죽은

후에도 같은 장소에 묻히었다.

케리가 설립한 Serampore 칼리지는 규모도 작고, 건물이 낡아 초라하게 보였다.

현재도 학생들이 목회자 훈련을 받고 졸업후에는 지역 교회에서 사역자로 일하고 있다.

인도는 종교가 다양하여 종교간의 대화가 활발한데, 졸업생들 중에는 이 분야에 큰 역활을

하는 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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