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0 - Thursday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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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건너편에는 사람포 강이 유유히 흐르는데, 대영제국이 인도를 통치하던

시대에는 이 항구가 상업과 해운의 중심지였다. 학교 옆에는 케리가 사역하던 교회가

있다. 교회도 낡아 보이고, 교세가 작아져 매주 수십명이 예배에 참석할 뿐이다. 그

옆에는 케리와 동료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숙소가 있다. 숙소 건너편 뜰에는 첫

세레자들을 기념하여 십자가와 기념비가 서 있다.

학교 본관 옆에는 케리 기념관이 있는데, 2 층 건물로 되어 있고, 2 층에 그의

친필들, 번역 사본과 그에 관한 책들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그가 사용한 시계를

비롯하여, 채집한 조그만 돌들, 바닷가의 조개 및 소라 껍질등도 진열되어 있다.

케리는 복음 전파 사역뿐 아니라 사회개혁과 여권신장을 위해 헌신했다. 카스트

제도는 물론 사회적 악습으로 인하여 많은 여성들이 고통을 받았다. 남자가 죽을 때

부인도 함께 불에 태워 죽였다. 고통이 너무 커서 여인에게 미리 술을 먹이거나 정신을

잃게한 후 불에 태웠다. 여인들의 소원은 남자보다 먼저 죽는 것이었다.        케리는

대영제국에 악습을 보고하고 행정당국의 도움을 받아 악습을 금지시켰다.

여인들은 개구리와 결혼해서 살기도했다. 남편 개구리가 물속에 들어갔으므로

재가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죽은 자의 영혼과 결혼을 시켜 과부된 자가 재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다. 부모들이 가난하여 밥그릇을 줄이기 위해

어린 딸을 결혼시켰다. 또는 소녀가 나이가 들수록 지참금이 비싸기 때문에 초혼을 시켰다.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지했다. 케리는 주민들을 계몽하고 악습을 타파하여,

여인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케리는 인도에 도착한 후 한번도 영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배로 영국을 항해하는데

6 개월이 걸렸으므로,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콜카타 시내에는 그의

                                    기념교회가 있다.  생존시

                                    한달에 한번 이곳에서 예배를

                                    인도했다고 한다. 교회건물의

                                    입구에 이런 글귀를 볼 수 있다.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하나님으로 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행하라.” 케리는 이 믿음으로 살며 인도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케리의 묘지는 초라했다. 그와 동료 선교사들과 가족들, 그리고 세 부인이

묻혀 있다. 그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A wretched poor man and

worm I fall 가장 불쌍하고 벌레 같은 인간이 잠들다”

케리는 선교의 아버지였으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알고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케리의 위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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